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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심의와 전쟁 ‘장난 아니네’

이상훈 고양 2005. 10. 7. 15:07
[특집]심의와 전쟁 ‘장난 아니네’
[뉴스메이커   2005-10-07 10:13:03] 

제작진과 심의담당자 팽팽한 전선… “심할 경우 열 번 이상 수정당해요”



“지난번 제품보다 발을 담그는 부분이 이만큼 더 깊어졌어요.”
“그럼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제품이라는 걸 더 강조해야겠네요.”
“여기에 컴퓨터 그래픽을 쓰면 되겠네. 그렇지, 느낌이 훨씬 살겠는 걸.”

추석연휴 전날 서울 양재동의 한 프로덕션 사무실. 새로 나온 족욕기의 쇼(인포머셜 광고) 제작회의가 한창이었다. 제조업체 관계자와 작가, PD가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보통 인포머셜 광고 제작에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 기획회의는 그 제작의 첫단추에 해당된다. 하지만 여러 제품의 광고 제작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프로덕션 사무실은 언제나 분주하다. 기획회의 후 일주일 정도 지나 원고가 준비되면 곧바로 출연자들을 섭외해 스튜디오 녹화에 들어간다.

건강식품 경우 심의 특히 까다로워

출연자는 제품을 소개하는 쇼호스트 두 명에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줄 연예인이 한 명 투입된다. 보통은 여성 쇼호스트 두 명이 짝을 이뤘는데 요즘은 남녀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이 대세다. TV홈쇼핑에서 활동하던 남성 쇼호스트가 인포머셜 광고 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초 현상’이 조금은 완화됐기 때문이다. 쇼호스트의 출연료는 500만 원 정도로 별도의 성공보수는 없다. 쇼호스트 뿐이 아니다. 제작에 관여한 어느 누구도 제품의 판매와 관련해 성공보수를 받지는 않는다.

스튜디오 녹화가 끝나면 제품의 특징을 더욱 세밀하게 보여주기 위한 ENG촬영이 시작된다. 재연전문 배우들이 이 제품은 이런 곳에 필요하다는 식의 상황을 원고에 따라 연기하면 여러 각도에서 반복해 촬영하는 지루한 과정이다. 촬영이 끝나면 간단한 편집을 하고 여기에 컴퓨터 그래픽 등 특수효과를 첨가한 뒤 종합편집을 한다. 완성된 영상 위에 성우 내레이션과 음악효과를 넣으면 인포머셜 광고 제작은 마무리된다. 마무리됐다고 하지만 소비자들이 볼 수 있을 때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다. 사실상 광고 제작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속타는 심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에게 인포머셜 광고 제작은 ‘심의와의 전쟁’으로 통한다. 허용되는 한에서 제품을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려는 제작진과 원칙을 따르려는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 심의담당자들 사이에는 팽팽한 한랭전선이 펼쳐진다. 한 인포머셜 광고 전문 작가는 “일반 공산품의 경우는 그나마 쉬운데 건강기능식품은 굉장히 까다롭다”면서 “심한 경우에는 열 번 이상 수정한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업계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관계자들은 “심의를 담당하는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가 인포머셜 광고를 일반 TV광고와 차별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일반 TV광고에서는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표현들이 유독 인포머셜 광고에서는 수정 대상이 되는 일은 이제 더이상 특별한 일도 아니다”라며 허탈해한다.

과장광고 업계 내부 자정 움직임

이들은 심의기준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전문 작가는 “똑같이 기능성 식품으로 식약청의 인증까지 받은 제품인데 A프로덕션이 제작한 광고는 그대로 통과되고 같은 광고문구를 쓴 B프로덕션의 광고는 수정 지시를 받는 경우도 있다”면서 “아무리 조심하고 신경을 써서 제작을 해도 어떤 결론이 날지는 누구도 모르는 상황이라 모호한 부분도 일단 집어넣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포머셜 홈쇼핑에 짙게 드리운 ‘원죄’는 업계 스스로 뒤집어 쓴 거나 다름없다. 그동안 인포머셜 홈쇼핑은 이런 저런 과장·과대광고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국의 관리 감독이 허술한 틈을 타 더 많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비심의 광고에 너도 나도 뛰어든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품질이 뒷전으로 밀리다 보니 반품이 급증했고 인포머셜 홈쇼핑의 이미지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 심의3부 이가연 심의담당자는 “특히 건강기능식품이나 의약품은 식약청 등에서 규정한 여러 가지 기준을 우선 따져봐야 한다”면서 “효능을 강조하는 화면이 반복되다 보면 시청자가 식품을 의약품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에 까다로운 심의는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문제를 깨닫고 업계 내부에서 자정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 변화를 주도하는 곳은 인포머셜 홈쇼핑 업체들의 모임인 (사)한국일반홈쇼핑기업협회. 협회 사무국 최종배 과장은 “지난해 9월 협회 차원에서 더이상 비심의 광고는 하지 않기로 결의한 상태”라며 “이제는 인포머셜 홈쇼핑에 대한 시각을 달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포머셜 업계 관계자들은 “과장·과대 광고는 옛날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지금 같은 경쟁구도에서 ‘폭리’는 취하려야 취할 수 없다”면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이제는 거둬달라는 화해의 몸짓을 보내고 있다.



연예인 출연은 성공의 보증수표?

‘인포머셜 광고용 연예인은 따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포머셜 홈쇼핑 광고에 출연한 연예인은 그 제품이 무엇이건 간에 어느 정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각오를 해야 했다. 비심의 광고가 횡행하면서 인포머셜 홈쇼핑의 이미지가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연예인은 출연을 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인포머셜 광고용 연예인’이라는 별칭도 생겨났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미지 손상의 염려가 덜한 중견 탤런트나 ‘한물 간’ 연예인들이 섭외 1순위로 지목됐다.

그러나 인포머셜 광고 출연이 의외로 짭짤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섭외가 가능한 연예인의 저변은 점차 넓어졌다. 한 관계자는 “인포머셜 광고에 출연하기 위해 매니저가 나서서 로비를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업체로서는 연예인의 출연은 비용이 추가로 들어간다는 위험부담이 따르지만 부족한 품질에 대한 약점을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됐다. 연예인의 출연료로 1000만 원 정도를 쓰니 매출은 이전보다 수십배 늘어났다. 때깔좋은 매트에 잠옷차림으로 누워 “아이구 좋다”라고 내뱉는 유명탤런트의 한 마디가 가장 확실한 효과를 나타낸 셈이다.

지금은 연예인 출연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예 연예인의 이름을 건 제품까지 선보일 정도로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인포머셜 광고에서 톱클래스 연예인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중후한 이미지의 탤런트 노주현·이순재씨 등이 출연하는가 하면 탤런트 강성연씨와 여성그룹 베이비복스, 영화배우 성현아씨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미지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이 인포머셜 광고를 더이상 꺼리지 않는 것은 ‘후폭풍’을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서철 PD는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이 출연할수록 제품에는 고급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 “연예인들이 인포머셜 광고에 출연해 입을 수 있는 무형의 피해가 이제는 거의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1000만원에 머물러 있던 연예인들의 출연료가 2000만원에서 5000만원까지 치솟았다는 점은 소비자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출연료 상승으로 제조업체가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 커진 만큼 제품 가격도 올라 결국 소비자가 모든 걸 떠안는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