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물가에 질식하다]① "헌 옷 사려고 아침부터 줄서요"
뉴시스 김형기 입력 2012.05.13 07:01
【서울=뉴시스】정일환 박기주 기자 = 정부는 최근 지난 4월 소비자 물가가 2.5% 상승하는데 그쳤다고 발표했다.
지난 3월에 이어 두달 연속 물가 상승률이 2%대로 떨어졌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행진에 고통을 받아온 지 19개월 만이다. 정부 발표를 믿는다면 서민을 옥죄던 물가가 드디어 잡히기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서민들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오이 한개 2000원, 참치캔 한통에 3500원인데 물가가 잡혔다니 기가막히다"며 코웃음친다.
정부가 실생활과 동떨어진 '통계 물가'에 매달리는 동안 '생활 물가'에 목줄이 잡힌 서민들의 삶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
특히 정권말기라는 특수성, 18대 국회 종료와 19대 국회 출범의 간극기를 틈탄 물가 공세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다.
서민의 발이나 다름없는 지하철 요금을 한꺼번에 50%나 올리겠다는 폭탄 선언이 나오는가 하면, 당국의 눈치만 보던 식료품 생산업체들도 일제히 "제품값 현실화"를 외치고 있다.
이제 곧 19대 국회가 개원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모양새가 너무 뻔하다.
뉴시스는 급한대로 ▲생활용품 ▲먹거리 ▲문화·레저 ▲교통통신 ▲교육비 등 서민의 삶을 옥죄는 '5대 살인 물가'의 현주소를 짚어 정부와 19대 국회가 과연 어디를 바라봐야 할 것인지 다시 한번 묻는다. [편집자주]
"5년전 쯤 첫째 아이 자전거를 살 때는 새 제품도 6만원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중고 값이 그 정도다. 물가가 올라도 너무 많이 올랐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중고용품 매장을 수시로 뒤진다."
직장인 심상현(33)씨는 얼마 전 온라인 중고장터인 '중고나라'에서 4만원을 주고 중고 유아용 자전거를 구입했다. 4살짜리 둘째 딸이 탈 자전거라 이왕이면 새 제품을 사주고 싶었지만 심씨가 원했던 브랜드의 새 자전거는 10만원을 훌쩍 넘어 부담이 컸다.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현명한 소비'는 바로 중고품 자전거 구매였다.
고물가 시대에 서민들의 생존방식은 '안 쓰던가 덜 쓰던가'이다.
물건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형편상 새 것을 사기 힘겹다면 차라리 질 좋은 중고물품을 사겠다는 것.
◇ "개장 전부터 줄 서서 기다려요"... 중고품 매장 북적북적
경기도 과천 중앙동 과천시민회관에 위치한 '녹색가게'. 이곳에선 옷부터 주방용품까지 갖가지 중고물품을 사고판다.
녹색가게에서 10년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정순예(55·여)씨는 "평소 70~80명이 오던 손님이 요즘엔 하루에 100명 정도는 꾸준히 오고, 좋은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개장 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옷을 고르던 신경호(63·여)씨는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오는 편"이라며 "처음에는 워낙 물가가 비싸서 들렀는데 물건이 좋아서 계속 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민들이 찾는 중고물품은 특정 상품에 그치지 않고 전 품목으로 확산중이다.
서울 종로구 종로2가에 위치한 중고서점 알라딘. 기자가 들렀던 지난 26일에도 이곳은 계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K문고, Y문고 등 대형 서점들이 즐비한 종로에서 지난해 가을에 문을 연 이 중고서점은 문학·사회과학·전문서적 등부터 음반까지 판매하고 있어 인근의 다른 대형 서점과 다를 바가 없다. 책의 질도 헌책방을 생각하면 안된다. 아예 새 책도 있고, 흠집이 있다하더라도 표지가 약간 구겨졌을 뿐이어서 매우 만족스럽다.
최근 몇 개월새 손님도 1.5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고영택 알라딘 중고서점 부점장은 "작년에는 하루 평균 1300명 가량이 방문했는데, 요즘은 평균 2000명 이상이 방문한다"며 "아무래도 경기가 안좋은데 새책을 사는 것보다 50%이상 싸게 살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 '소비패턴을 변질시켰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만 오르다 보니 중고용품점을 헤메는 서민들만 갈수록 늘고 있다. 덕분에 중고품 시장은 온-오프라인을 가릴 것 없이 급성장하고 있다.
심씨가 자전거를 구입한 '중고나라'의 경우 회원수가 900만명에 이르는 네이버 대표카페. 2003년 개설된 이 카페는 몇 년 전만해도 아는 사람이 제법 많은 정도였지만, 지금은 중고품에 관한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이 카페에서는 1초 단위로 새로운 중고품이 등록될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사고팔린다.
최근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고품 열풍은 흡사 외환위기 당시의 '아나바다 운동' 같다.
다른 점은 '아나바다'가 환란 극복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에 의해 몇몇 단체 주도로 행해진 캠페인 성격이라면 지금의 열풍은 살인적인 생활물가를 견디다 못해 자발적으로 등장한 '소비자 선택'. 일종의 구매패턴 변화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진영 수석연구원은 "물가 수준 자체가 높아졌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비슷한 품질을 가지고 있다면 중고를 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런 중고시장이 커지는 것에는 긍정적이다. 이런 시장이 커져야 새로운 제품의 질와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wha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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